2013년이었나… 출장지로 향하던 비행 중 기내영화로 ‘월플라워’라는 영화를 보게되었다. 너무 인상깊게 보았기 때문에, 업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푸랑크푸르트 공항 서점에 들러 원작 소설을 사게되었다. 원제는 ‘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였다. 영어가 친숙하진 않지만 꼭 원작을 번역없이 읽어보고 싶어 읽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화의 감독이 원작을 쓴 작가였다.
주인공 Charlie는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많은 아픔을 겪은 아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슬픔보다 남의 슬픔에 더 슬퍼하는 애처로운 아이인데 그 마음이 항상 정직해서 그의 독백을 읽다보면 내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든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 행복가운데 자신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이 영화의 좋은점 중 하나는 OST이다. 나는 미국의 8,90년대 감성에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 미국판 ‘응답하라’와 같은 느낌이 나는건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막연한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느껴지는데, 시대의 음악이 갖고있는 힘인것 같다.
영화에서 Charlie는 자신이 사랑하는 Sam을 위해 정성스럽게 playlist를 만들어 카세트에 녹음한다. 그가 Sam을 사랑하는 정도는 단순한 이성간의 끌림 이상이다. Charlie는 Sam의 남자친구를 못마땅해하는데(Sam에겐 약간 불량한 대학생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를 질투해서가 아니라, 그가 Sam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으며, 그녀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Charlie에게 안타까운 점은 ‘스스로 행복해지기’라던가 Sam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저 마음 속으로 바라고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 안타까움과 슬픔이 주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여러가지 사건들로 인해 Charlie는 벼랑 끝에 서게 되지만 결국 문제를 극복한다. 그리고 비로소 스스로 행복해지기를 결정며 Sam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에필로그에는 Charlie가 익명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있는데,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눈물이 난다. 그의 성장이 너무 기뻐서 이다.
believe it or not, I’m really not that afraid of going.
I might be too busy trying to “participate” .
제목에 사용되는 ‘Wallflower’라는 표현은 파티장에서 춤을 추지 않고 벽에 기대어 서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 즉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Charlie를 뜻한다. 신입생 시절의 그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춘기 소년이었다면, 이제 그는 자기 자신으로서 그곳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이 작품을 접한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 자신’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이를 응원하는 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곧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왜곡된 스스로에 대한 시선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은 사람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도 있다. 이 사이의 혼란에서 우리는 이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지나간 고통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작품을 몇 번이나 책으로 읽고 영화로 보면서, 나는 ‘연대’의 중요성을 느낀다.
언제든지 나약하게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이 함께한다면, 누가 넘어지던지 함께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이의 용기와 도전을 보며 만족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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